최근 여성혐오 발언들이 위험한 이유 조각글,감상과단상


** 워드에서 작성해서 옮겼는데, 폰트가 깨졌는지 띄어쓰기가 엉망이네요. 차후 수정하겠습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22018043


과거 여성비하여성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노땅이나 꼰대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이것은 여성비하 혹은 혐오가 시류를 역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현저하게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이들은조선후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차별주의자로 여성의 권리와 활발한 사회활동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2,30대 사이에서도 여성비하 혹은 여성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의사고를 근거로 여성비하를 자행하는 소위 나이든 꼰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 80년대 이후출생자는비교적 평등한 성역할에대해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던 하향 한계연령층이기 때문이다.예를들면,과거남녀 합반 학급의 경우 남성은 1,여성은남성 끝번호이후 번호부터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80년대 이후출생자들의경우에는 남자 1/여자1번을병용하는 환경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남자는반장,여자는부반장을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도 개선되었다. TV 드라마에서는남자 가정주부나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사회는 아직 변화를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여전히남자 가정주부는 변변찮은남자였고,워킹맘은일욕심 때문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엄마였다.조부모들은여전히 손자를 선호했으며 부모들은 씩씩하고 용감한 아들과 예쁘고 순종적인 딸을 기대했다. 이것은선택적 낙태가 기승을 부렸던 1990년대 중반,남아선호가극심한 일부 지역의 해당 년도 출생 여성/남성성비가 1:2에육박했던 사실을 통해 증명된다. 태어날 수있었던 여아 2명중 1명이그저 여아라는이유만으로 태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은이것보다 더 심하다.자연상태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80년대이후 출생자들은혼란스러운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학교와책에서는 성평등을말하지만,가정,대중매체,사회에서는여전히 성차별적인 정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이 상황은 지금도 본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했다. (멀리 볼것도 없이,10대남성을 타겟으로 한 웹툰이나 로맨스 소설을 읽어보라. 주체성이거세된 채 성적대상화된 여성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남성 캐릭터가 널렸다.)이런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아직 성역할에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보고 자란게 뻔하기 때문이다.80년대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비슷한 상태일 거라고 추측된다.


결국,립되는관념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논리를 구축해야만 한다.문제는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복잡하게얽힌 성적 관념들 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세심하게 골라낸다. 이것이남성은태생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므로취업 및 사회활동 시 우대받아야 하지만, 진급못하는 여성은 그 개인의 문제다.’ 라든지,‘여성은보호받아야 하고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므로 같은 월급을 받아도 남자보다 덜 일해도 된다.’같은괴논리가탄생하게 되는 이유이다.


사실이러한 괴논리들의발생 원인은 비교적 단순하다. 어떤성별도 손해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지금시중(?)에떠돌고 있는 성적 관념 중 어느 것을 차용하든 간에, 개개인의이익과 손해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전통적인성역할을따른다고 해 보자.젊은여성은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따라서대중시설이나 사회활동에 있어서 일정한 이익을 얻는다. 물건을나르거나 야근,철야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여성은 원래 외부에서 일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반면여성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아버지, 남편,오빠남성가장에게종속된 존재이기에 주체성에는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된다. 또한 남성 가장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폭력이나 학대를 당하더라도 도망칠 길이 없다. 현대의성관념을따른다면,여성은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로 남성들과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연약한존재이기때문에 받았던 모든 배려에서 배제되게 된다. 남성의경우에도 입장은 다르나 원리는 유사하다. 결국한쪽의 성관념을완전히 따르면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손해를보는 면이 있으나 이익을 보는 면도 확실히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현실적으로특정 성관념이일관되게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데 있다. 이것은개인이 특정 성별로서 겪어야만 하는 손해를 감수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상응하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남성으로서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야근과 철야를 여직원보다 많이 했어도 집에서 가장으로 존중 받지 못할 수 있다.여성으로서집안일과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데도 맞벌이를 해야만 할 수도 있다. 결국개인의 입장에서는 툭정성관념을따르는 것보다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내 이익을 챙기는 것을 선호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 특정 성역할의 수행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한 만큼의 이익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게다가지금은 불경기이다.직장을구하기도 힘들고,불안한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만을 소비하며 버텨야만 하는 시기다. 이런상태에서 특정성별이 우대 혹은 홀대 받는 일이 발생될 경우, 불만은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아니,실제적으로차별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사람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성차별과 관련된오해분쟁이발생할 수 있는 환경적 토대가 된다. 


이럴때 가장 필요한 것이 공정함이다.공정은공평과는 다르다.공정함에는옳고그름에대한 윤리적인 판단이 추가된다. 출발선이다른 상태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 여성이라는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하는 것, 남성이라는이유로 의무징병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모두가 함께 납부한 세금을 투자하는 것, 아동을보호하기 위해 어린이 보호구역을 설치하는 것, 취약계층의여성 미성년자를 위해 생리대를 무상 제공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다.


물론옳고그름을따지는 것은 가치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얼마든지 이견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대화와 합의가 필요하다. 물론대화나 합의는 과거는무조건 덮고 앞으로 잘하면 된다.’는식으로는 건전하게 진행되기 어렵다. 과거에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불리한 성역할을수행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익이 아예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주체성을 상실한 대가로 더 낮은 사회적 지위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사회가 변화하면서 여성의 인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고 또한 그에 필적하는 진보도 있었다.과거에비해 우리는 확연하게 평등하다. 이제는인류 전체의 인권 향상을 위해 부족한 부분은 더하고, 잘못된부분은 고쳐나가면 된다이러한상황에서 여성비하나여성혐오적인 시선은하등도움이 되지 않는다.비논리적이고,소모적이며,문제의본질을 흐리고 사회적 분란을 조장하는 행위일 뿐이다. 성역할에대한 불만은 공정함이 실현되면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다.


인권의진보가 인류의 가장 보수적인 부분 중 하나였던 성관념에미치기까지 기 백년의시간이 걸렸음을 상기하자. 많은희생이 있었지만 우리의 조부모, 부모세대는여기까지 해냈다우리는진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불교 집안에 시집간 개신교 며느리 이야기 – (2) 돌아가신 시아버님께 절을 해야 한다? 조각글,감상과단상

1.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큰 병에 걸리셨습니다. 병환이 워낙 중하여 간병인을 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서 아가씨가 거의 도맡다시피 간병을 하고, 남편, 시어머님, 서방님, 제가 쉬는 날마다 번갈아 가서 간병을 했습니다.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시던 시아버님은 결국 발병 후 1년 만에 돌아가시더군요.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이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면 2주 안에 돌아가실 것이고,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1년씩이나 버텨주신 것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호상은 아니었어요. 비교적 젊으셨고 너무 고생하다 돌아가셔서.......

 

2.

여기서 개신교 며느리 최고의 난제가 발생합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께 절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비개신교 집안들이 개신교 며느리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하는 이 난제는, 개신교 신자들이 우상이나 귀신에게 절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살아계실 때는 시아버님이시므로 기꺼이 절을 할 수 있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는 절을 못 받게 되시는 거죠. (비기독교인들 중에서는 개신교인들은 무조건 절을 안 한다고 알고 계시는 분들도 계신데, 그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인사로 절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전 어떻게 했느냐?

 

전 절을 했습니다.

 

3.

절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시댁 식구들이 제가 그래주기를 원했습니다. 절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제가 절을 먼저 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 언짢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점잖으신 분들이니 아마 별 말씀은 없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들이 그걸 원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런 이유가 있더라도 분향소에서 절을 하는 행위가 제 양심이나 신앙에 걸렸다면 전 절을 안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어요.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시아버님은 그 곳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차려진 음식상과 시아버님 사진에 절을 한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물론, 제가 그 곳에 시아버님의 영혼이 머물고 있으며 절을 하는 행위를 통해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빌고, 후손들을 돌봐주십사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건 좀 다른 얘기가 되겠죠.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저의 시아버님은 이제 세상에 안 계십니다.


절을 하고 어쩌고 하는 절차들은 그저 전통적인 장례문화에 기반한 예식에 불과했던 거죠.

어차피 장례식 절차라는 것은 100%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저는 그들의 평안을 위해 절을 했고요.

 

4.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는데요. 개신교에 기복신앙이 존재하는 것처럼 한국형 불교에는 다분히 도교적이고, 민간신앙적인 요소들이 많더군요. 저는 불교가 석가모니 기타등등의 깨달음을 얻은 인간들을 본받자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철학적인 종교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미신도 많고 관련된 귀신들도 많아요. 그 결과 장례를 치르는 삼 일부터 삼우제(5일 후)에 이르기까지 저는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각종 기상천외한 장면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 모든 과정들을 아무런 발언 없이 조용히 지켜보는 것은 분향소에서 절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시아버님의 영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거든요. 따라서 제 시각에서 엄밀히 따져보면 그 중 가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가(귀신)는 꽃을 좋아하니 화환이 많이 들어와서 좋다. 영정을 들고 집안을 살펴볼 때는 고인이 쓰셨던 방에는 들어가면 안 되며, 현관에서 고인의 밥그릇을 깨야 한다. 3일 상을 치르는 동안에 상주는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아서는 안 된다, 입관 후에는 머리에 세 번 물칠을 해라....... 나열하면 끝이 없어요.

가장 충격적인 일은 일하시던 직장 동료들이 노제(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지내주는 제사)를 지내줄 때 일어났는데요. 그 분들은 줄줄이 나와서 시아버님의 영정 앞에 돈을 놓으면서 사업장이 번창하게 해달라, 사업장을 지켜달라고 비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시아버님이 신이 됐어요.


개신교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저런 관점이야말로 귀신을 섬기는 거죠.

 

5.

만일 저희 부모님의 상이었다면 저는 그 상황에서 충분히 발언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며느리든 사위든 일단 혼인관계로 맺어진 상대편과 그 인척들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가족과 남편의 가족이 우리 부부의 혼인관계에 따라 이어진 것뿐이지 두 가족이 합쳐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따라서 저는 그분들이 저런 행동을 하시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런 행동들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하는 제 자신의 관점 역시 개신교라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요. 그 분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정성에 근거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요. 그것에 대해서 입을 대거나 더 나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6.

덧붙여, ‘아버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질문도 절 괴롭히더군요. 개신교 신앙에 따르면 연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사후는 천국 혹은 지옥뿐입니다. 산 자들은 불교나 천주교, 혹은 기타 종교들처럼 죽은 자들의 행방을 위해 기도할 수가 없어요. 오로지 사자의 생전 행적에 따라 사후에 갈 곳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긴긴 장례절차와 각종 금기들을 지켜보던 저를 더 씁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그 분들이 하시는 행동은 자기위로 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이란 것 자체가 산 사람들의 위로를 위한 것이긴 하죠.


그렇다고 시아버님이 지옥에 가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고들 하지만, 시아버님은 정말로 선한 분이셨어요. 평생 남을 해칠만한 행동이나 언행도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정말로 불심이 깊으셨고 독실한 신앙인이었어요. 심지어 하시던 사업이 잘못되어 빚더미에 앉으셨을 때도, ‘내가 안 갚으면 돈 빌려준 사람들의 신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에 개인회생도 하지 않으시고 몇 년에 걸쳐서 그 빚을 탕감도 없이 다 갚으신 분이에요. 그 때 고생이 너무 심해서 일찍 돌아가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결국, 저는 시아버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나쁜 곳에 가시지는 않았다고 믿는 셈입니다. 제가 믿는 신이 그 정도로 잔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안 간다고 해서 100% 다 지옥흑암권세에 놓인다고 하면 길이 너무 좁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여러 번 예수님밖에 없다고 강조했지만, 그거야, 그렇게 말 안하면 전도가 안 되니까 그렇겠죠. 바울의 말에 의하면 사랑의 신이고 모든 사람들을 자식으로 삼아 사랑하시는 조물주가 예수님 외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게 해놓으셨다는 건데....... 


저는 성경말씀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고, 100%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사람이 쓴 건데요. 만약 성경을 100% 신뢰하고 법처럼 지켜야 한다면 돼지고기도 안 먹고 비늘 없는 물고기도 안 먹고, 동성애자는 돌로 쳐 죽여야 되는 겁니까?

 

물론,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는 집사, 장로, 목사님도 계시겠지만, 그 분들이 저에게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목사님조차 교회에 봉사하는 하나의 직분을 맡으셨을 뿐이죠. 신 앞에 우리는 모두 동등한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요. 개신교에는 신과 평신도를 이어주는 사제도 없고, (성경에 없는) 지침을 발표하여 그것이 곧 교리가 되게 하는 종교 지도자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개신교인이라는 것에 만족합니다.

 

다음 편에는 절에 가야만 했던 개신교 며느리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길고 사적인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교 집안에 시집간 개신교 며느리 이야기 – (1) 종교의 차이, 문화의 차이 조각글,감상과단상


1.

저희 집은 개신교 집안입니다. 황해도 선천의 집성촌에 살던 증조부모님께서는, ‘교회도 못가게 하고 땅도 뺏으려고 하고 장사도 못하게 하는이상한 정권(?)을 피해 월남 계획을 세우시게 됩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도 사고, 새 일자리도 알아보는 등 차근차근 이주준비를 진행하셨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족들이 전부 이주하기 전에 38선 기준으로 민간인의 통행이 금지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넷째 아들이었던 저희 조부님은 집 1채와 함께 덩그러니 서울에 남게 됩니다. 이후 6.25가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가족들과의 소식마저 끊어지게 됩니다.

 


2.

가족사가 이렇다보니, 저희 집안의 모든 구성원은 태어난 이후에는 물론이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조부모님도, 부모님도, 저와 사촌들도 모두 모태신앙인 것이지요. 어린시절 저는 학교와 교회가 동급인 줄 알았고,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가는 것처럼 교회도 가는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집안의 문화는 한국 개신교교회의 지침을 철저하게 반영하는 것이었고, 명절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조부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성묘를 갔는데(선산이 평안도에 있으므로 그 전에는 성묘를 갈 곳이 없었음), 그러면 묘 앞에서 가정예배를 드렸죠. 술과 담배는 지극히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저는 명절에 가족끼리 모인 상태에서 단 한 번도 술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마시는 사람도 없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거든요. 외가는 천주교였는데 우연히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족 중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술은 나와는 관계없는 식품이 되었죠. 그때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술 안 좋아합니다.

 


3.

반면 남편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은 아주 독실한 불교집안으로, 결혼 전 남편의 가장 큰 걱정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기독교 믿는 며느리라고 널 싫어하면 어쩌지?’

시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걱정과는 달리 시부모님들은 지가 믿는건데 뭐 우리랑은 상관없다.’는 쿨한 태도를 유지하셨습니다. 외려 종교가 다른 며느리에게 절을 같이 가자고 권유하지 않는다는지... 등의 배려까지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이런 부분에서는 전혀 하지 못하셔서, 집안은 불교이고 당사자는 불가지론자인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원래 장로가 될 사위를 원했는데, 무교 사위는 당치 않다. 평생 교회를 다닌다는 약속을 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남편은 무신론자는 아니었으므로 신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교회 다니죠 뭐.’ 라는 심정으로 어머니의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이 조건은 남편이 타종교인이었거나 무신론자였다면 상당한 폭력이 될 수 있었던 부분이었죠. 저는 그렇게 종교에 따른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후술하겠습니다만 저렇게 서로 양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종교 문제는 저희 가족을 계속 따라다니게 됩니다.

 


4.

서로 다른 종교가 한 집안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결혼은 흔히 완전히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타인의 결합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차이 중 가장 배타적인 영역 중 하나가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집안의 결합은 그렇지 않은 결합보다 많은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평소에는 괜찮습니다. 일요일에 남편은 내키면 교회를 가고, 안 내키면 안 갑니다. 저는 교회 출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종교 특유의 비합리성을 비웃지 않고, 시댁 식구들은 우리가 휴일에 함께 절에 가자고 하면 새 식구가 싫어할까?’ 하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경조사가 있을 때는 좀 문제가 큽니다. 최근 시댁에서 상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다음 글에 이어서 써 볼까 합니다



M.스톤_범죄의 해부학_극단보다 더 심한 극단적인 사건을 보는 시선 오늘 읽은 책


1.

최근에, 취중인 어떤 남자가 헤어지자는 (전) 애인을 발과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때리고, (전) 애인이 도망가려고 하자 자신의 차를 몰고 가서 도망가는 사람을 쳐버리려고 시도(또는 치어버린)한 사건을 보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뜯어말렸는데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최근에 워낙 자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 사건은 그 흉폭함 부분에서 압도적이라 기억에 남았다.

2.


그런데 더 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1. 미성년자와 역시 미성년자인 주선자(친구)의 소개로 사귐
2. 미성년자 애인이 헤어지자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냄
3. 홧김에 주선자(친구)를 차로 친 뒤에 달리기까지 함
4. 잡혀와서는 '고의가 아니었다.' '주차하려고 후진했다(신호대기중이었음)' 등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음

최근에 본 추잡한 사건 중에서 거의 탑급인데, 확실히 사람들은 범죄의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범죄의 흉포함 정도를 범죄의 '질'로 판단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업무상의 실수로 5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과 자신의 변태적인 쾌락을 위하여 1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한 사람 중 후자를 더 심각한 범죄자로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조두순이 벌인 입에 담지 못할 범죄가 있는데, 실제 피해자는 1명의 소녀지만 그 흉악함에 있어서는 수백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월호 선장에 비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 기사의 남자도 그저 '미성년자와 사귀고 헤어지자고 하자 이별범죄를 저질렀으며, 그 내용은 주선자를 차로 친 뒤에 수 미터를 이동한 것 뿐(?)'인데, 그것들이 모두 합쳐지자 시너지효과, 즉 유의미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은 그저 '괴씸죄'에서 비롯된 비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마이클 스톤이라는 미국 범죄심리전문의가 기준을 만들었다. 그 기준은, 여러 세부 기준이 있지만 투박하게 설명하자면 비윤리성과 흉폭성이다. 이 기준에 따라 범죄를 분류하면 극도로 분노하지도 않고, 상대방에 대한 원한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쾌락을 위하여 비참하게 상대를 고문하거나 살해한 사건을 최악의 범죄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범죄를 분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의사다보니, '어떤 범죄자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와서 성실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부분에 집중한 모양이다. 즉, 일견 잔인해보이는 범죄일지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 곁으로 돌아와 살 수 있는 범죄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차량을 후진시키다가 자신의 아이를 보지 못하고 치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는 어떤가? 아무 죄도 없는 아들을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지만 이 사람은 죄값을 치르고 정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면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해도 된다. 하지만, 조두순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회에 복귀해서는 안 될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분류는 꽤나 쓸모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차량을 후진시키다가 실수로 자신의 아이를 치어 죽인 아버지와 저 기사 속의 남자 중 죄질이 더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더 이 사회에 위험한 존재일까?

혹은, 애인의 외도에 순간적으로 분노하여 계획하지 않은 치정살인을 저지르고 당황하여 시체를 숨기고자 토막낸 남자와, 끝없는 사기 행각을 일삼아 수백명이 넘는 피해자를 양산하고 그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게 만든 남자 중 누가 더 죄질이 나쁠까?

관심 있는 분들은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길.


범죄의 해부학 - 살인자의 심리를 완벽히 꿰뚫어 보는 방법

저자: 마이클 스톤 저/ 허영은 역
출판사: 다산초당
출판일: 2010년 9월
별점: ★★★☆

범죄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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